친척들 이야기. 이야기


결혼식 때 뵌 친척들 생각 : .... 우리 친척들이지만 무서웠음 ()


-큰아버지네 
 
큰아버지께서는 소싯적 그림을 하려 하셨다.. 원래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셨고, 관심도 많아서 젊은 시절 아빠랑 같이 국사교과서에서나 나오던 .. () 그 울산 암구대 벽화 있지 않은가, 그 그림의 묵화를 본뜨러 가신 적도 있으셨다 들었다.  중학교 시절 경복고에 미술 특기자로 제의 받았을 정도였으나 그치만 자존심에 그냥 시험쳐서 합격했다고 (..)  그리고 미대를 준비하시다가 여름방학 때 생각을 바꾸어서 치과의사이셨던 할아버지의 의견대로 의대를 준비했는데 바로 연대 치대 ! 우.. 우왕ㅋ굳ㅋ 더 놀라운 건 큰어머니셨다. -ㅅ-;; 큰 아버지네는 호주에서 사시기 때문에 나는 큰 어머니를 뵌 기억이 없다. 물론 어릴 적엔 뵈었겠지만 여튼 내 기억에서 큰어머니를 뵌 건 이번 결혼식이 처음이었다. 처음에 어느 다소곳한 분께 언니가 인사를 할 때는 몰라뵈었는데, 알고보니 큰어머니셨던 것이다.; 그리고 큰 어머니와 큰아버지는 ... 연대  CC...  그것도 미술 동아리에서 만나 인연을 맺으셨다고 했다. 큰 어머니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아는 바라면 그 분이 다른 친척들이 함부로 말씀을 꺼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점이었으며, 그분을 표현하는 단어가 '신여성' 같다라는 말인 것 밖에는 ....() 이대 의류학과를 가겠다는 사촌동생을 앞에두고 다른 친척들이 재수를 권하는 말을 이리저리 하고 있을 때 큰어머니가 말씀을 꺼내셨다. =_=..

 
자신은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항상 스트레이트로 최고의 학생이었고, 본인이 패션디자인을 희망해서 현재의 연대 생활과학대에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항상 A를 찍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대학원까지 다녀 대학의 교수로 재임했었지만, 그 뿐이었다고. 자신이 논문을 쓰기 위해 전국의 공장을 방문하면서 조사했지만 한국의 상황은 도저히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교수가 되셨다고 했다. 사촌언니 역시 자신을 닮아 미술 분야의 재능이 특출해서 대학 갈 당시 패션디자인을 하겠다고 떼를 썼지만 자신이 말렸다고 했다.  (현재 사촌언니는  모션 그래픽을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학강사로도 일하고 회사에서 프리랜서처럼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 디자이너로서 사는 것은 물론 화려하지만,  굉장히 수명이 짧고,  받아주는 곳은 적으며 고생하면서도 자신의 창조력이 끝나는 순간 남는 것은 없었다고 말이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 하나가 굉장히 출중하여 의대를 갈 수 있었는데도 디자인이 하고 싶어서 디자인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을 다니고, 뉴욕에 가서 활약했지만 나이 서른이 된 지금은 도로 의대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적성에 대해 고려하는 것도 좋지만 Hobby와 Vocational Field를 구별할 줄 알아야한다. 사회가 너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네가 사회 구조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너의 직업이 장차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 고려하라는 말씀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어른의 말씀이다. 저 말에 내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굉장히 놀랐던 것은 그 분이 입을 연 순간 중구난방식으로 전개되던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싹 정리한 것,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 그리고 세상사의 지혜를 조화롭게 버무려서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침착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과 사촌동생이 공감할 수 있게 말씀하신 점, 단호하면서도 강력하게 그 담화 공간을 자신의 독보적인 발언 공간으로 바꿔놓는 그 능력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래로 집안의 어른 중에 이런 분을 뵌 적이 없다. 들으면서 저 모습이 바로 가문의 맏며느리다! 라고 감탄했다. 물론 그분의 화려한 능력도 물론이었지만 그 분의 존재는 그 이상이었다.(...) 과연 다른 친척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엇다.     
 

큰 고모네 :  
 큰 고모의 큰 딸인 언니가 드디어 미국에서 돌아왔다. 대학을 들어갈 때는 성적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 성대를 들어갔다 했다. 도 장학금에 약대까지 다니셨던(..) 큰 고모의 화려한 과거 경력에는 못 미치는 바였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뛰어난 성적은 거뒀던 언니는 상공부 장학생의 특채를 받고 졸업하자마자 자동으로 7급공무원이 되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무역상으로 잘 나가던 큰 고모부는 사업이 기울어지시면서 타국에 계시고(지금은 돌아오셨다) 시집에서도 냉대를 받으면서 삼남매를 어렵게 키운 큰 고모네에서 실질적인 장남의 역할을 한 언니였다. 안타깝게도 두 아들을 낳고서, 남편은 교통사고를 사별했지만 출세에 있어서는 그분은 참 운이 좋았다. 외교산업 관련으로 큰 일이 있었는데, 고시를  치고 들어온 사람들이 출세에 지장이 있을 까봐 모두 피한 결과 그 일을 그 언니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생은 어마어마하게 했다. 그러나 언니는 일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는 10년만에 5급 공무원으로 뛰는 결과였다. 게다가,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국가에서 보내주는 유학을 미국으로 갔다왔다. 원래 미국으로 가는 자리는 나기 어려워서 애초에 기대않고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있던 언니에게는 큰 우연이었다. 그래서 아들 둘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국가의 지원으로 2년, 자신의 힘으로 1년 2개월을 더 다녀서 박사학위를 따고 올해 가을인가에 돌아왔다. 현재 중앙부처의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 큰언니가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큰 고모는 언니의 옷 뒷자락을 바로잡아주면서 참으로 말할 수 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 회사에 들어간 둘째 언니와 제약회사에 들어간 막내 아들보다 아마 몇 배나 더 소중할 테다. 큰 고모 부부는 그 언니와 같이 살면서 아이들을 봐주고 있다고 했다. 사족을 달자면, 나는 아이들을 보고 놀랐는데, 애들이 초6, 중1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무얼 먹고왔는지 포동포동하고 덩치가 크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근데 아빠엄마 저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면 곤란합니다.)
 
 
 
작은아빠네 :

현재 사촌동생의 재수 여부는 친척들 사이에서 태풍의 눈이다. 나머진 다 1등급인데 수학이 3등급 나왔다 -_-;; 현재 이대 의류학과랑 고대 건축공학에 내놨다고 하는데, 본인은 그냥 재수하지 않고 이대 의류학과에 다니겠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후회할 것은 알지만 사촌동생이 재수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의대에 대한 작은 엄마의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추석 때 내려갔을 때도 수시로 넣은 서울대 의류학과가 붙지않으면 바로 재수해라 ,.. (..) 라고 아침 식탁에서 말씀하셨는데 친척들을 앞에 두고 그럴 정도면 애랑 둘만 있을 때는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그렇기에 본인은 도리도리했지만 큰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조금 갈등하는 듯도 했다. 나는 재수를 하기를 권장했다. 아깝기 때문이었다. (학자금을 대출할 걸 생각하면 .. )  그리고 작은 엄마는 결국 서울대 의류학과에만 붙으면 의대를 가라고 고집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재수를 하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 항상 논란에 서 계신 삼촌 .. 이번 결혼식에 결국 불참하고 일본 여행가서 함흥차사가 되셨다. 사촌 동생의 추측을 들으면서 순간 얼이 빠질 뻔했다. 작년에 단약을 선언하신 이래로 오히려 조울증 상태는 악화되었고, 작은 엄마와 사촌동생은 반쯤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다. 집에서 그림만 그리고 계시거나 혼자 돌아다니신다 했다. 내 생각엔 상태가 거의 빈센트 반 고흐에 필적하고 계신다. 화요일에 있을 할머니의 제사미사 때 참석할 수 있도록 큰아버지네께서 사력을 기울일 것 같다.   
 
 




 내 기억 속 가장 인상 깊은 할머니의 모습은, 난을 치시던 모습이었다. 화선지 위에 붓으로 난을 그리시며 난은 이러저러하게 치는 것이다 라고 여덟아홉살 되던 내게 가르쳐 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양반가의 규수였던 할머님. 아마 우리 집안의 예술쪽 재능에 큰 영향을 남기셨을 거다. 실제로 할머님이 그리신 그림이 몇몇 점 남아있다.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매화를 그린 것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난을 즐겨 그리시던 할머니의 난 그림이 남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도자기들도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원래 11월 29일은 할머니의 제사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본래 제사를 지내다가 삼촌네에서 그만 둔 것을 우리 집에서 다시 재개하기로 했기 때문에 결혼식 날짜랑 겹쳐서, 화요일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무교를 선언한 이래로 종교적인 행사의 관여하기 싫어하는 나지만, 관혼상제에 대해서는 예외로 치기 때문에,  꼼짝없이 성당에 가야한다. 그리고 친척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될 텐데, 이건 흔치 않은 기회다.
 
사실 난 종교에 얽히는 것을 싫어한다. 내 남편 될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교이길 바란다. 사실 이번에 성당에 가게 되는 것도 달갑지 않다. 종교적인 모든 것과 그들의 공간을 싫어하는 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공간이 그 시간에 어떤 양상을 띄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 역시 종교적인 맥락 속에서 자라온 사람인지라, 가끔은 그런 상상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나 혼자, 홀로 그 공간에 있을 때. 밝은 별빛 아래과 희고 건조한 물가로 고요히 잠겨간다.



뭐 , 그 이야기를 차치해도 , 참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집에 돌아올 때는 차가 막혀서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다. 간만에 악어가 선물해준 예쁜 티팟을 꺼내고, 선물받은 얼그레이 티백 하나를 꺼내 우려냈다:) 나는 차를 잘 우리는 편은 못 된다. 시간을 좀처럼 잘 맞추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해서 그렇다. 그렇지만, 차를 이렇게 예쁜 티포트에 우려 찻잔에 담아내고 그 수색을 보는 순간만큼은 , 참으로 좋다. 그 때만큼은 다른 사색을 접고서 나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차를 마시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글을 썼다.



사촌오빠의 결혼식 .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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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사촌오빠 결혼식에 다녀왔다. 아들만 셋인 작은고모의 첫째아들의 결혼식으로 , 내가 철없이 뷔페를 기다리며 발만 동동 굴리던 어릴 적이후로 처음 보는 결혼식이었다.  내가 알지못하는 많은 사람들, 집안 어르신들께선 반가워하며 여기저기 인사를 하시고 다녔다. 간만에 우리 친척들도 대거 모였고 말이다 . 참 많은 것을 봤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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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그 결혼식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을 넘었던 것도, 주례사의 주례가 길고 지루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나는 결혼식에 대해서 좀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1시간 전부터 친척들은 로비에서 서로 모이고 인사하며 정신없이 담소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내원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리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다른 사람의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저 안쪽에서는 결혼식을 하면서, 완전히 닫지도 않은 유리문 밖에서는 우리측 결혼식의 축의금을 걷느라 부산스러웠다. 신랑인 사촌오빠 역시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친척들께 인사하고 덕담을 듣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사촌 오빠 역시 그 자리에 계신 많은 친척들 중 상당수를 모르는 듯 했다 .. ()
 
결혼식을 알리는 안내원 소리가 들렸다. 예식장에 곧바로 사람들이 들어섰다. 이 안내원의 소리는  마치 마트에서 세일할 때를 알리는 것 마냥 울려 두고두고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결혼식 진행 역시 부산스러웠다. 친척들의 수군수군 나누는 이야기와 저 뒤쪽에서 들리는 또다른 결혼식 대기자들의 부산스러움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왠 사진가가 그렇게 많은지, 이리저리 플래쉬를 터뜨리며 신랑 신부의 서있는 모습을 촬영하고, 하객들의 모습을 찍는 사진가가 4명, 영상 촬영자가 한 명 들어가 정신없게 만들었다. 만약 나라면, 결혼식 때의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보단 차라리 저 결혼식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할 인생의 마디와도 같은 저 순간을 저렇게 정신 사납게 보내고 싶지 않았을 테다. 결혼식은 정말로, 학부모들을 모시고 연 어린 시절의 학예회나 연극과도 같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저기 서 있는 신랑신부인가, 하객들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아닐지도 모른다.      

 주례는 길고 지루했다. 그렇지만 나의 예상이 그렇듯이 이 신랑과 신부에 대한 덕담에는 여지없이 그들의 학벌과 직업에 대한 칭송이 곁들어져 있었다. 의대 이비인후과에 들어가 대학병원의 의사로 어엿하게 자리잡은 사촌오빠와, 역시 치과의사인 신부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남부럽지 않는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주례사의 말씀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분명 자랑할 만한 것일테다. 그러나 저런 말들은, 다른 결혼식 장에서도 아무런 위화감 없이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에 안심하기도 하고, 혀도 쯧쯧 찰지도 모른다. 사실 학벌 문제는 한국사회의 대다수가 민감할 문제일 테지만, 저것이 정녕 한 순간도 사람을 놓지 않고 파고든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혼식은 싫지 않았다. 대기실에 있던 신부는 정말 예쁘셨다. 정말로 거의 연예인 급이었다.  이전에 사촌오빠가 폰카로 찍었던 신부 아가씨의 모습은  그냥 수수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신 신부는 마치 인형 미인이 되어서 등장하셨다. 저것이 결혼식 신부의 후광일까 ... ㄷㄷㄷ 참 부러웠다. 친척들 모두 신부가 참 곱고 이쁘다고 다들 칭찬하셨다. 신랑되는 친척 오빠 역시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근사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작은 고모님과 고모부께서도 마찬가지로, 거진 밤을 새시면서 친척분들과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장남의 결혼식이니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결혼식은 집안 행사다. 결혼식을 치르는 건 신랑신부지만 사실 그들의 친구와 지인보다는 친지들이 하객 중에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친척들이 간만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기 싫진 않았다. 오히려 명절 날보다 더 흥성흥성했고, 더 많은 친척들을 볼 수 있었다. 각각 지방에 떨어져 사느라 일년에 몇번 만나지 못한 어르신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면서 즐거워하셨다. 피로연에서도 옹기종기 아는 친척들끼리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담소를 떠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또 오히려 명절날에는, 명절 음식 준비며 성묘며 등등으로 피곤해하시며 소탈하신(?) 모습도 보여주시던 친척분들이 좀더 편안하신 것 같았다. (물론 축의금과 예의치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덜 했던 것 같다.)

 사촌 오빠는 정말로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놀 때도 심심해서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쉴 때 할 일이 없어서 한 달 정도 토익 공부를 하고 한번에 900을 넘겼다는 것과 반대로 운전 면허 시험에서는 두 번 낙방했다고 놀림받은 소소한 일화가 있다.(....)  당연히 여자에도 관심이 없어서 선을 봤는데, 한 1년 넘게 여러 여자분들을 만나보다가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피부가 고와야 하느니, 얼굴이며 키가 어때야 하느니 하는 참으로 사소한 조건을 따졌지만 (...) 지금의 신부를 결정할 때는 그런 쓸데없는 조건은 다 상관없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물론 직업적 조건은 따졌다.) 결혼식에 너무 긴장되서 자긴 정신없이 보냈다는 사촌오빠는 그래도 끝나고서 들떠보였다. 두 사람은 아마 무난한 가정을 이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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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간만의 만난 친척들은 명절 이상으로 단란했고, 신부 되시는 분께서는 예쁘셨다. 결혼식에서 삐딱한 자세를 견지한 나지만, 그래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만큼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저런 화려하고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둘째딸을 애지중지했던 아빠의 손을 잡고서 결혼식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 짝이 될 사람 옆에 가만히 서서 결혼 서약을 하고 축하를 받겠지. 그게 몇년 후가 될지, 내 옆에 서 있을 사람은 누구일지, 나는 그리고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인지 살짝 궁금했다.  






그 사람.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 .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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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의 밀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바로 그겁니다. 

 꽤나 친하게 잘 지내는 친구가 있었는데 , 이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것은 오래 전 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유달리 외로움타는 애를 그냥 두기 어려워서,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저와 잘 맞았기 때문에 몇번씩 같이 놀곤 했다. 그러다가 그 아이는 술 마신 김에 좋아한다고 말을 해왔는 데, 그 때와서 보니 나도, 이 아이도 서로에게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첫 눈에 반했다고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처음보는데 당장 고백하는 것도 뭣하고 게다가 처음 봤던 OT 날 끝나자마자 내가 소개팅을 나갔기 때문에 고백을 못하다 악어한테 뺏겼단다.-_-
 
나는 마음속에서 악어를 나의 시간과 애정과 나 자신을 들여 가꿔왔는데,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도 조그많게 자라고 있었던 거다. 악어와는 나의 다른 부분을 교감하면서, 내가 가끔씩 준 물을 남김없이 들이마시면서 커왔던 것 같다. 참 난감한 것은, 악어와 이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들과 있어주게 된 이유 역시 비슷했던 거다. 차라리 삼촌이 누누이 얘기했던 개르섀비키면 =_= 상관 없이 그냥 내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냥 멀쩡한 사람이다. 평소 공부에 빠져 살고, 나와 음악 취향이 맞고(악어와 맞지 않는 몇 안되는 내 취향),  지나치지 않게 한 두잔 마시는 맥주를 좋아하고, 굉장히 독특한 면을 지녔고, 사람 대하는 데는 서툴지만 속은 잔정 많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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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달콤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마치 꿈과 환상과 같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란 세상은 안타깝게도 내일 하루의 일도 온전히 예견할 수 없다. 몇년 후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 누구와 함께 있을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그렇다 어른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이전에 단순하게 믿어왔던 그 모든 개념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내가 그렇게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지금 그 사람의 일만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안전히 있을 때도 있으면, 헤맬 때도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중에 누구와 어떻게 함께 있을지는 정말 모를 일 아닌가. 1년전 깐죽이에게 고백하려 망설일 때도 나도 내가 1년 후에 이렇게 될 지 몰랐는데 말이다. 

 

 악어는 이 일로 좀더 어른이 될 것 같다. 성장통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성장통에 연고를 대어주지 않는다. 악어 역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하는지 깨닫게 될 테니까. 물론 내가 지금 선택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악어다. 나는 악어와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해왔고, 더 많은 나를 보여줬고,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악어 옆에서 있기에 지킬 것은 지키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정말 힘들어서 부르면 가지 않기 어려울 것 같다. 괜히 착한 것인지 잔정인지, 외로운 그 사람을 그저 두고 보기 어렵다.  글쎄, 그랬다. 나는 여태까지 어른인 척 했는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니 악어는 나보고 선배는 여전히 자기에게는 어른이라고 했다. 그래, 그럼 나이 더 먹는 어른 되지. 착한 어른은 아니고, 그냥 나이 든 어른.  

 

 조금 가혹해져도 나는 어른이 되겠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 삶이라는 극장의 2막을 맞이한 걸 환영한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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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거리의 조각가였나? 홍대 놀이터 근처 점집. 그 집에서 나보고 2014년까지 남자친구 하나 없이 지낼 거고 기가 너무 세서 남자들이 못 올거라고 했는 데 이건 뭔가요.=ㅅ=
    


3일 인연


울었다.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었고 그래서
조금 많이 , 아팠던 것 같다.

이름을 지어주지 말걸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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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의 주인공은 악어가 아닙니다. 또 다른, 제가 좋아했고 저를 많이 좋아하던 다른 사람이에요 .


달걀 이야기

어제 부터 달걀 후라이가 급 땡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밥을 먹고 , 얼그레이를 마시면서도 결국 또 이렇게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달걀 프라이를 하나 해 먹었다. 나는 달걀 노른자가 위에 터지지 않고 있는 상태를 좋아하는데, 터저 버렸길래, 팬을 조금씩 기울이며 원 모양을 그리도록 만들었다. 아, 노른자가 익는다, 노른자 국물이 참 맛있건만, 아깝기만 해라. 사실 나의 고백 하나를 달걀에게 속삭이자면, 나는 어릴 적에 달걀 노른자 보다 흰 자를 더 좋아했고, 노른자가 동그랗게 얹혀져 익혀지지 않은 상태보단 노른자를 기어이 터뜨려 다 익혀 버리곤 했었다는 거다. 미안해 달걀, 그치만 나는 어릴 때도 달걀 삶은 건 항상 반숙을 좋아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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